[BOOK]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별점
★☆☆☆☆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기승전결이 없다.
조롱은 그를 외톨이 같은 기분이 들게 했고, 행동 또한 외톨이처럼 변하게 했다.
이로 인해 그에 대한 편견이 굳어졌고, 그의 신체적인 결함으로 야기된 경멸과 적대감은 더욱 심해졌으며,
이방인 같다는 그의 인식도 자꾸만 강해졌다.
무시를 당하리라는 만성적인 걱정은 그에게 동등한 계급의 사람들을 회피하게 하고
자기보다 열등한 자들 앞에서는 더 의식적으로 위엄을 갖추려고 애쓰게 만들었다.
멋진 신세계 中
영화 이퀄리브리엄이 생각났다. 물론 '제약'의 결은 조금 다르지만 '문학과 감정'에 대한 격리, '약물' 등 두 작품은 유사한 점이 많다. 아마도 영화가 책을 모티브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1표를 던져주고 싶다. 참신한 소재를 던져준 원작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넘어설 수 없는 우월성이 있지만, 그런 '원조' 논란을 떠나서 영화가 훨씬 잘 짜인 스토리라고 생각된다. 크게 3가지 이유를 들어 책을 비판해보고자 한다.
1. 존의 캐릭터 - '갑자기'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캐릭터가 아닐까. 갑자기 화를 내고 갑자기 체제를 격렬하게 비난한다. 문학 작품 몇 개로 세상에 대한 깊은 사유는 있지만 또 다른 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연민은 없는 존재. 행동의 원인에 공감이 되지 않으니 그 행동에 대해서도 의문이 뒤따른다. 존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은 존재이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작품 몇 개를 읽었으나, 어머니가 타처에서 온 인물이기에 보호구역 내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람들과의 감정적 교류 또한 극도로 낮았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세상에 대한 사유는 충분한 것으로 표현된다. 통치자와 대화에서도 '권리'에 대한 깊은 사유가 엿보인다. 이런 존이 천재가 아니라면 누가 천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나드, 레니나 등 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이해도 비치지 않는다. 물론 존에게 이해에 대한 의무는 없으나 적어도 체제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는 (문학적) 역할을 하는 측면에서 자신과 1:1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성향에 대해서 격렬한 분노는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2. 체제에 대한 의문을 드러내는 방법 - 영화에서는 우연하고도 사소한 계기로 약 먹는 것을 건너뛴 후 '낯선 감정'을 경험하면서 체제에 대한 의구심을 느끼게 되고 그 의구심은 곧 체제에 대한 질문이 된다. 책에서는 의문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는 캐릭터(존)가 실제로 타 쳐를 경험하게 되면서 겪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되는) 문화충돌과 그에 따른 존의 좌절을 통해 체제에 대한 의문을 드러낸다. 그런데 인디언이 우리에게 와서 자연을 해치고 신을 믿지 않는다고 분노한들 이미 이 체제에 녹아있는 우리들이,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이미 알라를 믿고 있는 우리들이 '아! 우리가 잘못되었구나! 우리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나무에 깃들어 있으신 어머니 신을 믿으면서 살아야겠어!'라고 생각할까? 당연히 답은 '아니다'이다. 아마도 그 인디언을 바라보면서 연민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이미 문명을 깨우친 자의 자비로움으로.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체제에 대한 비판은 내부에서 이루어질수록 그 효과성이 크다. 차라리 버나드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체제 전복을 일으키고자 했다면 그 시도가 실패하고 디스토피아는 계속될지언정 나에게는 큰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3 . 야만인 보호구역의 필요성 - 야만인 보호구역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체제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자라는 장소가 필요하다. 야만인 보호구역에서조차 이방인으로 자란 누군가는 타처를 동경하지만 타처에는 속하지 않는 John으로 자라 체제에 대해 비판자 역할을 하게 된다. 두 번째는 타처에서 자라온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타처의 삶을 행복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야만'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부러움이 아니라 혐오를 느낀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혐오를 일으키는 대상은 존재해야만 한다. 이런 존재적 당위성을 가지는 '야만인 보호 구역'이라는 장소는 소설을 위해 필수적이지만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현재 우리의 삶과 유사한 삶을 살아온 '존'이하는 이야기는 때때로 공감을 일으키지만 그래서 '도대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의문이 들게 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교육받은 세대이기 때문에 오롯이 비판자 캐릭터에 몰입되어 소설에 빠져들 수 없는 한계점이 된다.
여기에 추가한다면 '과학과 문명'의 발전에 대해 포커스를 맞췄다는 점도 비판하고 싶다. 과학의 발전은 항상 옳다. 과학은 자아가 없다. 그저 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 달라질 뿐이다. 이 책을 읽기 전 책과 함께 따라오는 문구는 항상 유사한 메시지가 있었다.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줄까?' 책의 뒤편 옮긴이의 말에도 이러한 문구가 있다. '과학과 행복과 인간성의 함수는 결국 기계 문명만이 남는다는 불평등 방정식을 남긴다.' 만약 저자의 집필 의도에 과학에 대한 비판 의식이 하나도 없다면, 이 책의 마케팅 담당자들은 하루 세끼 콘푸로스트만 먹으면서 반성해야 한다. 과학의 발전은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성'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주로 마케팅되는 포인트와는 포커스를 달리해서 잃는 편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새로운 방식의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자라날 때부터 통제가 되었지만 그러한 삶을 행복이라고 할 수 없는지? 지금의 우리 모습이 타처와 유사하다고 생각되지 않는지? 왜 통치자는 과거의 문학을 가지고 있는지? 타처에서의 삶을 불행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현재 주입된 교육 때문이 아닌지? (오히려 타처의 삶은 문명화 되기 이전 인류의 삶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등등 여러 의문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디스토피아 소설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