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애니메이션이지만, 전작의 감동을 주기에는 조금 부족"
별점 : ★★★☆☆
세 번째로 소울을 추천받던 날,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비교적 문학이나 서정적인 이야기에 대해 ‘감동’을 받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지인이 ‘이 영화 볼만하더라’고 했을 때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이자면, 인터넷에서 밈으로 소비되는 전형적인 이과 감성의 사람이다)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는 최고점에 달했다. 기대가 커서일까, 처음 UP이라는 영화를 봤을 때만큼 긴 여운과 감동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픽사는 픽사. 잘 만들어진 영상, 그리고 그와 조화를 이루는 잘 만들어진 음악은 역시나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픽사 특유의 '부드러움'이 돋보인다
영화의 분위기는 역시나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으레 풍기는 그것과 유사하다. 전반적으로 둥글고, 따스하고, 부드럽다. 전체적인 색감이 검은색/푸른색이 주를 이루는 장면에서도 특유의 부드러움은 잃지 않는다. 어두운 것을 너무 어둡지 않게, 마치 그 어둠 또한 부드러움의 일부로 표현하는 것이 픽사 애니메이션의 큰 장점인 듯하다. 특히 ‘죽음’을 다루는 장면에서 무게중심이 확고해서 좋았다. 자칫 부드러움을 잃어 다른 장면과의 괴리가 생기거나, 반대로 부드러운 표현 방식이 작품 자체의 공감 능력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위화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울 또한 무던히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세련되고, 조금 더 다듬어진 날카로움 속에서도 잃지 않은 픽사만의 감성
영화를 보다가 가끔 ‘인터스텔라’가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면 이런 장면들일까? 싶었다. 특히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표현하는 방식이 기대보다 더 세련되어서 놀랐다. 색감과 속도감을 조절해서 주인공과 같이 이동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반대로, 사람의 ‘감각’이 확장되는 느낌을 주는 장면 또한 그 순간이 마치 느리게 재생되는 듯이 흘러가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과 감동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확실히 내용도 내용이지만 영상과 음악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오케스트라 연주로 듣는 클래식 같은 웅장함에서 오는 감동이라면 픽사의 애니메이션은 따스한 봄바람을 맞으며 이어폰을 통해 듣는 잔잔한 피아노곡 같은 감동이 있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이 음악에 운명을 느껴 업으로 삼고 있는 캐릭터라 영화를 보는 내내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중 재즈공연을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재즈를 통해 서로 교감하는 장면이 잘 표현되어서, 웬만한 재즈 음악을 다룬 영화보다 빠져들어 봤다. 특히 일반 영화는 몰입에 대한 표현의 한계가 뚜렷한데 반해 애니메이션은 장르의 특성상 그 선을 비웃듯이 뛰어넘어 버리고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무리 없이 그러한 표현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흥미로운 장면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영상과 음악은 관람자가 주제와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들게끔 영화의 중력을 높여준다.
삶을 살아가는 목적에 대해 이제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자
내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본 생각일 것이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년마다 장래 희망을 써냈다. 무엇이 되고 싶니, 너의 목표는 뭐니,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뭐니.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삶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기를 강요받는다. 이 영화는 이런 질문에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꼭 목적이나 목표가 있어야만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가?
사람의 삶은 시작이 있을 뿐이다. 나는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준비되었기 때문에 ‘살아가기’를 시작했다. 살아가는 중에 여러 갈림길을 만났을 때 어디로 갈지, 어떤 길을 선택할지 판단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저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내가 살아가는 것의 목적이 될 뿐이다.
한동안은 잊고 살았다. 무언가를 해내야 할 것 같았고, 어떤 목표에 조금이라도 다가가야 했다.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서 나는 지금 얼마큼 목표를 이루었는지 평가하고 조금의 변화를 위안 삼으며 지내왔다. 목표가 있기에, 그 목표에 다가가지 못하는 순간 죄책감이 생겼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들에 대한 위로이다. 그 때문에 나에 대한 위로이다. 살아가고 있어서 잘하고 있다며, 현재 내가 느끼는 감각, 감정, 현재 내가 뿌리내리고 있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메시지를 던진다.
메시지는 주인공 인생의 베스트 장면들을 모아둔 장소에서 잘 드러난다. 그때 주인공은 자기의 인생을 보면서 이렇게 외롭고 쓸쓸했나, 하는 생각에 조금은 충격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나중에 주인공은 알게 된다. 그 순간에 자기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나는 반대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더라도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그저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즐기고 감사하라고 해서, 목표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갈림길이 왔을 때, 선택의 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지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판단근거는 필요하다. 다만 그 목표가 내 삶의 최종 지향점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수단이 목적으로 치환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끊임없이 자기학대를 할 수밖에 없다.
매 순간 감사하고 감동받는 삶이 가능할까?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조금 느슨해졌다. 우선, 결말 그 자체가 아쉽다. ‘그래서 너는 매 순간 감사하고 감동하면서 살 수 있어?’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 나는 사람이고, 내 감정에 대해 오만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매 순간 감동할 수 없는 사람이다. 물론 평소에도 햇살이 아름다워서 즐겁고, 바람이 시원해서, 눈에 담기는 풍경이 따스해서 행복하다. 그러나 때로는 불안하고, 때로는 자기 비난을 하며, 때로는 과거를 후회하면서 살 것이다. 그래서 결말이 아쉬움이 남는다. 감동은 덜할지 모르지만 좀 더 현실적인 결말이었으면 좋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건 개인적인 취향이므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결말까지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결말에서 조금 느슨해졌다고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 다음 장면이 예상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클리셰적인 결말이다 보니, 다음 장면이 예상이 가고, 그 해결이 신선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뻔한 이야기라면 뻔한 결말을 동화 같은 이야기라면 동화 같은 결말을 주었으면 좋을 텐데, 뻔한 이야기에 동화 같은 결말이라 괴리감이 느껴졌다.
사실은 위인도 별 거 없잖아?
이 영화는 유머러스한 장치도 곳곳에 많아서 사실 별다른 교훈을 얻지 못해서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재미있는 포인트 중 하나는 ‘22번’을 지구로 보내기 위해 초청된 멘토들이다. 링컨부터 아르키메데스까지 다양한 위인들이 나와서 ‘22번’을 교육하지만, 결국에는 백기를 들고 만다. 그 때 나오는 대사를 곱씹어 보는 재미가 있다. 아참, 지하철에서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던 캐릭터는 존 레전드 같았는데, 혹시 누군가 안다면 답을 줬으면 좋겠다. 다음에 친구들과 같이 보고 이야기를 나눠봐도 좋을 것 같다.
인생에서 10년 단위로 봐도 좋을 영화
10년이 좋을 것 같다. 10년 마다, 내가 수단을 목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달려나가고 있을 어느 때에 한 번씩 보면 어떨까.